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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愛日堂)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58.0x124.0x7.9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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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애일당(愛日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8.0x124.0x7.9
  • 건물명 애일당(愛日堂)
  • 공간명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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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愛日堂)

애일당(愛日堂)


애일당(愛日堂)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집안 어른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늙은 부친을 기쁘게 하기 위해 1512년(중종 7)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분강의 기슭 농암바위 주변에 건립한 정자의 편액이다. ‘애일’은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한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효지孝至」에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 스스로 부족함을 알았던 이는 오직 순 임금이로다. 이 세상에서 오래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이르니, 효자는 하루하루를 아낀다. [事父母自知不足者 其舜乎 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라고 한 데서 뜻을 취하였다. 부모를 섬길 날이 많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농암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농암 이현보는 「애일당중신기愛日堂重新記」에서 “이 당에 올라서 마땅히 정자의 이름을 보고 그 뜻을 생각하여 부모님이 늙으면 오직 효도로 법칙을 삼고 자신이 살아있는 한 가업을 이어받아 발전시킬 것만을 생각하고, 그런 뒤에 한가할 때 마음을 탁 터놓고 정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는다면 애일당은 집안 대대로 지켜야할 규범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후손들에게 효의 가치를 계승·발전시킬 것을 당부하였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로, 일설에는 중국 제2의 명필이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 어느 해 홍수가 나서 정자를 쓸어 갈 때 현판도 떠내려갔는데,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강에 나갔다가 금빛 찬란한 것이 떠내려 오기에 건져 보니 애일당 편액이었다고 한다.

애일당(50.0x84.5x7)과 같은 글씨다. 하나의 글씨를 가지고 두 개의 편액을 만들었다. 양자의 차이는 좌우공간의 크기가 다르다. 이 편액이 애일당(50.0x84.5x7)에 비하여 자간 공간이 넓고 따라서 편액의 길이가 더 길다. 두 편액이 같은 글씨인데도 느낌이 다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간이 좁은 애일당(50.0x84.5x7) 편액은 글씨가 부각되고 서로 관계가 밀접한 반면 공간이 더 큰 이 편액은 원거리에 보이고 관계가 소원하며 상대적으로 정적이 된다. 글씨는 주변 공간과 중요한 관계에 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글씨 쓰기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편액의 각서자가 간혹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소개


영천이씨(永川李氏) 농암(聾巖)종택은 고려 초기 영천 출신 평장사 이문한(李文漢)의 후손이다. 고려 말 군기시소윤을 역임한 영천 출신의 낙은(洛隱) 이헌(李軒)이 1350년(충정왕 2) 경에 예안의 부내[분천汾川]를 지나가다 수려한 산수에 반해 이거하였다. 입향조 이헌은 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이파(李坡)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흥현감을 지냈다. 그의 외손녀가 노송정 이계양의 배위이니, 곧 퇴계 이황의 조모이다. 따라서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은 7촌의 인척이 된다. 둘째 이오(李塢)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으로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손녀사위가 되었고, 관찰사 금숙(琴淑)과 사돈관계였다. 이파의 아들로는 이효손(李孝孫)과 이성손(李誠孫)이 있다. 이효손은 봉례를 역임하였으며, 이효손의 첫째 이흠(李欽)은 인제현감을, 둘째 이균(李鈞)은 직장을 지냈다. 이흠의 장남이 바로 청백리에 관리로 뽑혔고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농암 이현보이다.

이현보의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과 설빈옹(雪鬢翁),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부친은 이흠(李欽),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겸(權謙)의 딸이다. 1467년(세조 13) 경상도 예안현의 분천리에서 태어났으며 1485년(성종 16) 19세 때 부친의 엄명을 받고 예안향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발분하여 공부에 진력했으며 20세 때 당대 대표적 문장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서 이황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와 함께 동반 급제하였다.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 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세자가 공부하는 서연에서 강관이 실수한 일을 이현보가 보고하자 연산군은 당일로 보고하지 않고 하루가 지난 뒤에 보고했다는 트집을 잡아서 그를 의금부에 하옥하고 이어서 안동의 안기역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 성주목사 등을 거치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렇듯 외관직 선호 이유는 부모가 연로해서 가까이 모시기 위함이었다. 1525년(중종 20) 부친의 나이가 80세에 이르자 사직을 청하였고 이후로는 대구부사, 평해군수, 영천군수,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등 주로 고향과 가까운 외직을 선택하였다. 결국 1542년(중종 37)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지냈다. 만년에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된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는 1품인 숭정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 보기 드문 재야정승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농암은 관료 문인의 문학이 성행하는 시기에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라는 새로운 문학 세계의 지평을 열었으며, 「어부가漁父歌」, 「어부단가漁父短歌」를 비롯한 「효빈가效嚬歌」, 「농암가聾巖歌」, 「생일가生日歌」 등 한글로 된 시가 작품을 남겼다.

영천이씨 농암종택은 원래 도산구곡 중 4곡인 분천곡에 있었다. ‘분천(汾川)’은 우리말로 ‘부내’라 불린다. 부내는 전국 최고의 살기 좋은 터전으로 꼽히는 도산구곡 중에서도 으뜸가는 곳이었다. 농암은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고 찬탄하였다. 그러나 입향한 지 620여 년이 흐른 1974년 안동다목적댐 건설로 모래톱 맑고 물새 한가롭게 노닐던 부내 앞 강변은 물속으로 영원히 수장되어 버렸다. 종택도, 거기에 딸린 긍구당도, 긍구당 앞에 있던 아홉 형제 숙질이 함께 가지런히 인끈을 걸어 놓아 구인수라 불리던 홰나무도 물속에 수장되었다. 이후 25년이 지난 1994년 무렵부터 농암종택 후손들 사이에 종택을 이건하여 복원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농암 종손 이성원은 실향의 실의를 접고 새로운 부내를 만들 준비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낙점된 곳이 바로 청량산 농암 묘소 뒤편, 도산면 가송리다. 2000년 들어 정부는 경상북도 북부에 유교문화권역을 만들기로 하였다. 2001년 드디어 국책사업의 기본 계획도가 완성되었고, 2003년 긍구당과 사당이 이건되고 종택의 정침과 사랑채가 복원되었다. 이어 2004년에는 문간채와 부속채가 지어졌으며, 2005년에는 분강서원이, 2006년에는 애일당, 농암각자, 신도비 등의 문화재와 건물이 이건되고 명농당, 강각 등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농암종택은 20세기 후반에 도산구곡의 4곡에서 8곡으로 장소가 완전히 이동된 흔치 않은 예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애일당은 1512년(중종 7)에 분강 기슭의 농암(귀먹바위) 주변에 있는 커다란 자연석 위에 지어졌다. 이후 수해로 정자가 무너지자 1548년(명종 3) 원래 위치에서 5미터 정도 위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애일당은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영지산 남쪽 기슭으로 다시 옮겨진 후 2006년 지금의 가송리로 이건되었다. 애일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로 방 1, 마루 2, 방 1의 구조로 되어 있다. 전퇴를 두고 계자난간을 설치했으며, 전열칸은 2중보를 걸었는데 종량은 홍예보를 쓰고 그 위에 포대공을 세운 구조이다. 애일당은 농암의 부모 봉양을 위해 지어졌지만, 점차 산수를 유상하는 가단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애일당은 처사적 풍류의 장으로서 이후 영남사림의 건축조영에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주승택, 「농암 이현보의 생애와 문학」, 『선비정신과 안동문학』, 2002.
  • 『안동의 현판』, 안동민속박물관, 2004.
  • 김서령, 『지금도 「어부가」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 안동 농암 이현보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이성원,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푸른역사, 2008.